미라클러의 맛있는 이야기

배낭여행

12시간을 공항바닥에서 - 2007.7.21

  아침 일찍 6시 15분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이동했다. 아시아나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옆의 카타르 항공은 일찍부터 직원들이 나와 분주히 준비하고 있는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물어봤더니 8시나 9시 정도면 올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래- 1시간이나 두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이거지- 우린 여유있게 컨테이너벨트에 앉아-_-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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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텅~ 빈 아시아나 카운터>


  이윽고 지금쯤 내가 한국에 도착했을 줄로만 알고 계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10유로 지폐를 환전창구로 가 동전으로 교환했다. 2유로를 넣고 전화를 걸었다. 0082-2-XXX-XXXX 엄마가 받으셨다.

  "인천 도착했니, 얼른 와라"

  "엄마 저 독일이에요.-_- (중략)"


  공항 전화를 동전 잡아먹는 기계로 명명한다. -_-
1분이 멀다하고 1유로씩 파파박 빼앗아 가는 동전기계가 내 동전들을 무참하게 낼름낼름 받아먹었다. 정말 짤막한 전화통화를 하면서 4유로를 썼다.




  8시가 되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9시가 되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꾸준히 30분이 더 지나갔다. 우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는 10시 반까지만 더 기다려보라고 이야기했다.

  한 시간이 더 지났다.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인포메이션 센터로 다시 갔다.

  시간체크를 해보더니 4시 20분까지 기다려보란다. 아놔-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컨테이너벨트에 푹 앉아있자니 바로 옆의 카타르 항공 직원이 와서 날 부른다

  "Hey, Gentleman~ "

  젠틀맨? 내 옷차림을 보아하니 그다지 젠틀하지는 않다. 아마 날 부르는게 아닐거야. 아닐거야.

  결국 코 앞까지 온 직원은 내게 이 컨테이너 벨트에 앉아있으면 안되니까 짐을 가지고 다른데로 이동하란다.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아시아나 항공 창구가 잘 보이는 건너편 바닥에 풀썩 주저 않았다. 시간이 안가도 너무 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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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이렇게 넘치는 시간을 어찌할 줄 몰라 당황스러운데, 어제는 정말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내가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우리말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클레임과 카운터를 오가며 이야기했으니까.

  일단 자기들 측은 전혀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하려는 그네들의 말 속에서 내 의사를 분명히 표방하고 납득시키는 것도 일이었지만 한국에서 익숙했던 영어 발음 - 미국식, 영국식, 호주·뉴질랜드식 - 이 아닌 낯선 느낌 일색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는 것도 꽤나 집중력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이제 영국,미국인의 발음만을 이상ideal로 삼을 필요는 없다는 World Englishes 개념에 대해 절절히 배우는 시간이었다고나할까.

  프랑스식 억양이 짙은 영어- 난 '빠르띠꿀라리'가 particulary, '알쟈~나'가 Asiana 였다는 사실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속에서 결국 일을 원만히 해결했다. (사실 처음 직원이 알쟈나 측과 연락해서 연결해주겠다는 말을 할 때 나는 뭔가 아랍계 항공사와 연결해주겠다는 말인 줄 알았다) 이후 에어프랑스 측에서 마련해준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오늘 아침 7시부터 이곳에 나와 바닥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스펙테이터, 나는 방관자로, 구경꾼으로서의 인생을 살 것인가, 즉 바닥에 편히 주저 앉아 어디론가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만 보는 삶을 살텐가 하는 것이었다.  

  멍-한 눈빛으로 비스듬히 누워 하루종일 브라운관이나 쳐다보고 있을 때, 오늘도 누군가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피렌체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가슴벅찬 기분으로 근처 호숫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순간 먹먹하게 가슴으로 다가왔다.

  한데 짐을 모아두고 서로 15분씩 짐을 보면서 아시아나 직원들이 출근하는 것을 체크하기 위해 기다리기로 하고 다른 한명은 그 15분간 공항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나는 서점이 있는 것을 보고 서점에 들어갔다. 음, 당연한 걸까? 당연한 것이겠지? 독일어 일색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는 사진과 카메라 잡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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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녀석들>

  독일어는 모르지만 사진을 볼 수는 있으니 곧 나는 사진잡지를 집어들고 꽤나 한참을 보고 서있었다. 15분이 지나갔다. 하지만 동생녀석은 손목시계는 유럽여행 첫째날 망가진 이후로 아직도 시계약을 갈아주지 않은 상태라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모를게다. 음하하(뭐 공항 여기저기에 시계가 있는 것을 간과한 나의 실수였지만). 그리고 나는 한참을 잡지를 들여다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International 부스. 오옷, 인터내셔널 부스에서는 말 그대로 다양한 국제어 번역 도서를 팔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The Alchemist를 집어들었다. 연금술사. 책 이야기는 참 많이 들었는데 아직도 읽지 않은 책. 10.8유로(13000원 가량)를 건네고 그 페이퍼백을 샀다. 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작 책을 사서 시간을 보냈을텐데. 동생과 사람이 상상가능한 최고 수준의 재미없는 농담을 서로에게 집어던지며 시간을 때웠던 장면들이 스쳐지나가 눈물이-_- 날 뻔했다. 항공기에 탑승하고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꽤 매력적인 책이라 한국에 도착해서도 차분하게 한 번 더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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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녀석. 방금 캐논 익서스70으로 찍었다>

  위에서 참 말이 길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우린 아침 7시부터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아시아나 항공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오후 4시 반에 출근한 아시아나 창구에 제일 먼저 달려가 티켓을 발권받았다)

  사람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매일 아침 2시간씩 운동을 하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도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눈을 뜨면 컴퓨터 본체 전원부터 누르는 사람도 존재한다. 외국어를 꼭 공부해야할 필요는 없다. 우리말만 할 줄 알아도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지). 자기 선택 문제다. 공부하느냐 마느냐.

  돈이 손에 쥐어져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부터인지 20대부터 돈을 쥐어짜 모으라는 식의 재테크 서적이 넘쳐난다. 나는 반대로 걸어가고 있다. 20대에는 돈을 쥐고 있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돈을 투자해야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400만원이 넘는 돈을 한 달동안 유럽에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 분명 쉬운 결정은 아니다. 뭐 부모님 잘만나 넙죽넙죽 돈 받아가며 편히 여기저기 여행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지내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돈들을 뒤로 꽁꽁 묻어둘 생각은 없다.

(사실 나도 매달 20~40만원 가량 씩은 주식이다 펀드다 뭐다 해서 여기저기 묻어두고는 있다. 그런데 내게 이 과정은 허리띠 졸라매는 저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경제 수업에 가깝다. 경제학 서적, 재테크 서적만 읽고 책장에 꽂아두거나 모의주식투자 프로그램을 돌려보는 것만으로는 실질적인 경제적 관념이 자리할 수 없음이 당연한 일 아닌가)

  한 달 동안 편히 유럽을 돌아다녀보는 것.

  과소비일까. 낭비일까. 맞다. 누군가의 눈에는 분명히 과소비일수도, 혹은 더 나아가 속칭 '돈지랄'로 내비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확언컨데, 책, 여행, 그리고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내가 추구하는 가치들에 대한 투자는 반드시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풍요로움으로 돌아올 거라 믿는다. 지금 당장 20대에 겉으로는 통장 잔고 액이 얼마다 뭐다 해서 그럴듯한 외관을 드러내기보다는 내면의 실상이 풍요로움 사람이 되고 싶다. 외관은 번드르르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적막감과 공허감으로 가득찬 삶을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분명히 이 거대한 기계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하늘 위를 날고 있는데에도 불구하고,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에 움푹 들어앉은 내가 느끼기에는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것만 같다. 창밖을 내다보면 구름들이 쉭쉭 비행기 날개 위를 스쳐지나간다. 바다에 배들이 조그마하게 보이는가 싶더니 낯익은 풍경이라 믿어지는 대륙이 어느새 길게 내다보인다.

  한달 전 우리가 박차고 떠났던 바로 그 대륙이다. 한반도다. 여기에서 볼 때는 조막만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온갖 도심 교통의 도움을 받아도 느릿느릿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곳.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익숙한 언어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바로 그 곳. 서울. 고려대학교. 여의도가 있는. 한 달 동안 내내 그리워했던 그 땅. 기체의 요란한 굉음과 착륙하는 찰나의 진동과 함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체에서 내리고 나니 좁은 비행기 창문으로 곁눈질 하던 세상이 아닌, 확 트인 시야가 내 안으로 빨려드는 것만 같다.



  자유. 

  작년 이맘때부터 나는 유럽을 꿈꾸며 정신없는 학기를 보냈다.
  유럽이다. 유럽으로 가는 거야.

  13시간의 두근거리는 비행시간을 통과한 끝에 처음 바라 본 런던 시가지의 정돈된 모습, 그 정갈한 붉은 지붕들의 나열은 13시간 동안 온몸을 비틀며 시간을 애써 과거로 밀어 보냈던 이코노미 클래스의 불편함마저도 잊게 만들었다. 말로만 듣던 런던이었다. 영화 '이프 온리'에서 봤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런던 시내와 빨간 공중전화박스, 그리고 빨간 이층 버스. '노팅힐'에서 들었던 영국 특유의 억양. 그리고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자꾸만 들먹거렸던 런던의 건물들.

  점차 런던의 건물들이 가까워져오고 내 손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까지 비행기가 다가섰을 때의 그 기분좋은 두근거림. 이래서 여행에 빠진 이들은 틈만 나면 자꾸만 배낭을 싸는구나. 이제는 나도 그 행렬에 기꺼이 동참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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