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오늘 갑니다"
노트르담 근처 생 미쉘 거리에서 어제 봐두었던 기념품을 구입하고 flunch에서 점심을 먹었다. 샐러드바의 최적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체크하는 점원의 모습이 보였다. 신선한 치즈가 섞인, 딱 기분좋을 정도의 따뜻한 매쉬포테이토 맛이 정말 좋았다. 입자가 무척 곱기 때문에 부드럽게 스윽- 넘어가는 목넘김(?)이 훌륭했다. 삶은 당근도 참 맛있었다.
여행일지를 정리하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내가 먹을 것에 이토록 집착했었나- 하는 점이었다. 그날 무얼했고 어떤 것을 보고, 어느 거리를 걸었었는지는 적혀있지 않아도 그날그날 어떤 음식을 먹었었는지는 꼭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품평까지 말이다. 아무렴, 먹는 것 중요하다. 창피할 건 없다고 본다. 음하하.
샤를 드골 공항으로 향하는 RER 안에서 아코디언을 들고 있던 청년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유럽을 떠나는 마지막 날 악사의 연주를 죽-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유럽에서는 갓파더(한국 배급명 '대부')의 메인 테마로 쓰인 음악을 무척이나 자주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샤를 드골 공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들었다.
우린 샤를드골에서 예상치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보딩패스를 받고 커다란 두 개의 백팩은 수화물로 부치고 택을 받아들고 체크인까지 했는데, 4시에 출발하는 에어프랑스 기가 기술적인 문제를 이유로 취소되어버렸다. 이녀석들 정말 간단한, 불어 발음 짙게 섞인 어조로 technical problem 이라는 단어만 되풀이하면서 '샌드위치+음료' 쿠폰 하나씩 달랑 던져 주며 6시 25분 보딩패스를 발급해주었다. 그냥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할 사람들이야 조금 더 늦어져도 조금 불편한 정도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우린 상황이 좀 더 복잡했다. 6시 20분이면 아시아나 항공기에 탑승을 완료해야 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항공티켓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곧바로 아시아나 기를 탑승해야 하
는 건데 (표를 보여주면서)이렇게 시간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죠?"
"저희 에어프랑스 측에서는 결항된 항공기에 대해 다음 항공권을 준비해드리는 것으로 모든 의
무이행을 완료했습니다. 다음 일정에 대해서는 아시아나 측에 문의하세요."
부르르. 애니메이션 '심슨'이 미국 사회에 대해 웃음을 자아내는 비꼼 개그를 구사한다면, 프랑스에는 '아스테릭스(Asterix)'가 있다. 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솔직하면서도 자조적인 비틀기.
"직원2 : 알아보려면, 대장 사무실로 가 보세요."
모 아나운서의 프랑스 유학시절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프랑스의 행정절차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까닭없이 무료하고 초조하게 서너시간정도는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는 일이라고. 프랑스에 고작 일주일남짓 있었던 주제에 프랑스를 비꼬는 글을 쓸 수는 없어 다른 이의 말과 삽화를 빌렸다.
뭐 일단 샌드위치+음료 쿠폰은 샤를 드골 공항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뭐 먹을거라도 먹기로 했다. 분명히 쿠폰에 모든 옵션 선택 가능이라고 표기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샌드위치 매장 직원은 가장 싼 샌드위치 두 품목만 선택할 수 있다고만 되풀이해서 이야기했다. 에라이, 나는 참치 샌드위치를, 동생은 토마토 샌드위치를 선택했다(본래 나는 치킨 샌드위치, 동생은 베이컨 샌드위치를 선택할 생각이었음). 어라- 그런데 쿠폰에 음료도 선택 가능하다고 표기되어있는데 직원이 샌드위치 줬으니까 가란다.
발끈,
"저기있는 아이스티 500ml 병 둘 추가요. 여기 음료수도 포함이라는 거
안보여요?"
"원래는 안되는 건데, 드릴게요"
원래 안되긴 뭐가 안돼 임뫄-_- 넌 너네 말도 제대로 못읽니?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아이스티 병을 받아들었다. 창가에 앉아 차갑고 질긴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온갖 국적 비행기들이 뜨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온갖 만상이 다 밀려온다. 원래 내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프랑스 국경을 넘어 독일로 넘어가고 있어야 할 시각이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주근깨 많은 프랑스인 여자에게 왠 뚱뚱한 흑인녀석이 다가와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걸기 시작한다. 얼씨구나 머리가 복잡해 공항 정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정을 미리 예견하는 듯 했다>
그래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자마자 막 뛰어가 사정하면 아시아나 항공기에 탑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현 가능성 희박한 희망이라도 품고 있었는데 6시 20분 비행기가 1시간이 더 지연되어 7시 20분에 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구르릉 거리며 달린 끝에 공중으로 부양하는 순간만큼 유쾌한 찰나도 없겠지만 파리를 뜨는 내 심정은 그런 순간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안전벨트를 풀어도 괜찮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후 캔콜라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하고 콜라와 함께 나온 과자부스러기를 우적이며 독일 상공을 비행했다.
막상 프랑크푸르트에 내리고 보니 석양이 보석처럼 깔리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낭만에 젖을 여유란 없다. 얼라리, 그런데 클레임에 갔더니 우리 가방이 없다. 빨리 가방을 찾아 아시아나 카운터로 가야하는데 상황이 어째 복잡해진다 싶었다. 컨테이너 벨트에 하나씩 하나씩 흘러나오던 짐의 행렬이 어느순간 뚝 끊겼다. 그때까지도 우리 가방은 나오지 않았다.
"이봐요, 우리가 탄 항공기는 에어프랑스 505A 인데요, 지금 이게 수화물 전부 다
나온건가요?"
"네 이게 전부 맞는데요, 나온 짐이 없으시면 따로 신고센터로 가셔야 합니다."
시간이 이렇게 촉박한데 여기서 또 짐이 우리 길을 막는구나. 우린 신고센터로, 그리고 안내직원에게로 왔다갔다하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중간에 직원들이 잘못알려준게 있어 헛걸음이 좀 있었다. 꽤나 먼거리였었는데 말이다.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라더니 과연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무척 컸다. 모노레일을 통해 1, 2, 3센터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린 롯데월드 모노레일을 타는 느낌-_-을 만끽하며(2001년 1월 이후 롯데월드에 가본 적이 없다) 프랑크푸르트 모노레일을 타고 각 센터들을 오갔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석양도 사라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일단 짐을 찾기 전에 우리 표부터 해결하자는 심산으로 아시아나 창구로 갔더니 이미 자리가 다 비었고, 옆에 있는 카타르 항공 직원이 아시아나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다고 이야기하며 본인도 짐을 챙겨 바삐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공항이 텅 비어버렸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에어프랑스 측에서는 아시아나 항공권과 관련된 문제는 아시아나와 이야기하라고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언급했던 것이 생각났다. 후우- 그런데 아시아나 측은 모두 퇴근해버렸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우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홀로 남았다.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은 대략 16만원 정도. 이거면 별 셋, 별 넷짜리 호텔에 가도 하루 숙박비로는 충분한 비용이다. 별 둘 짜리로 가면 6만원이면 될게다. 그런데 내가 왜 내 돈을 써가며 하루를 더 유럽에 머물러야 하는 거냐고 아놔!
우린 에어프랑스 측으로 갔다. 다행히 여직원 1명과 기장 같은 제복을 입은 남자분 1명이 남아있었다.
"(표를 보여주며)저기요, 저희가 4시에 파리에서 출발하는 에어프랑스를 타고 이곳으로 와 곧바로 아시아나 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는데요. 기술적 문제로 6시 20분 에어프랑스기를 탔기 때문에 아시아나기를 놓쳤어요. 그런데 방금 아시아나 창구에 갔더니 모든 직원들이 다 퇴근해버렸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죠? 아참, 그리고 에어프랑스 측에 저희 수화물을 부쳤었는데 아직도 못찾았어요. 저희 짐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확인좀 해주시겠어요?"
"(연신컴퓨터를 두드리고 몇 군데 전화를 해보더니) 손님의 짐은 현재 프랑크푸르트에 와있는 상태인데요 어디로 가버린지는 확인이 안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는 5분 후 약도를 그려주면서 그곳으로 가면 우릴 기다리고 있는 직원이 있을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우린 그곳으로 가서 직원에게 또 한번 짐을 잃어버리게 된 경로를 설명해주었다(우리 사정, 상황 다 이야기해둔 상태라더니! 으앙). 직원은 열심히 찾아봤지만 우리 짐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린 다시 그 먼길을 돌고 돌아 에어프랑스 측으로 갔다.
.
.
.
.
으악!
그나마 남아있던 에어프랑스 측 직원 두 사람도 퇴근해버렸다.-_-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여직원이 다시 나타났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정말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짐을 찾지 못했다고 하자 또 다시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다가 우선 우리 항공권 이야기부터 하자고 한다. 여직원은 에어프랑스 측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기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하면서 내일 아침 다시 공항으로 와야겠다는 말을 끝으로 짐을 챙겨 퇴근을 하려는 기색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제 잘못도 아닌데요. 에어프랑스 측의 잘못이 아니라고는 하셨지만, 제 입장에서는 에어프랑스 측이 기술적인 결함(technical problem)으로 결항시켰고 전 그 결항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비행기를 놓쳤으니 결과적으로는 에어프랑스 측의 잘못이지 않나요? 저는 제 돈으로 하루 숙박할 생각도 없고 그럴 돈도 없습니다."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흐르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제복을 입은 남자직원이 웃으며 등장했다.
"혹시 손님 짐이 커다란, 매우매우 커다란(big and big, big, big) 두 개의 시커먼 백팩인가요?"
오우, 커다란 두개의 시커먼 백팩. 나와 내 동생의 노스페이스 가방임에 틀림없었다. 그 직원은 어찌된 영문인지 두 개의 백팩이 에어프랑스 기장실에 와있었노라고 이야기했다. 난 멀찍이서 까만 물체를 보는 순간 내 가방임을 알아보았다.
"오우 마이 백~ 마이 백~ "
감격적인 상봉-_-의 순간은 지나가고 다시 여직원과 마주했다. 자뭇 심각한 표정을 짓던 직원은 곧 하얀색 용지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들더니 에어프랑스 측 호텔 하루 숙박분 수표를 써주었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저녁을 아직도 못먹었다. 뻔뻔하고 뺀질거리는 내 성격은 내친김에 한번 더!라는 심정으로 여지없이 발동되었다.
"저기요,
저는 에어프랑스를 놓친 덕에 아직 저녁도 못먹었는데요."
음하하하하. 그 직원은 저녁 식사 분 70유로까지 결제 허가하는 도장을 찍어주었다. 오늘 저녁은 동생과 근사한 호텔에서 9만원짜리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나는 흐뭇해지기 시작했다. 우린 우아하게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에어프랑스 측이 마련해준 호텔로 이동했다. 엄청나게 크다. 호텔 외관을 보는 순간 우린 짐작했다. 우리 유럽여행의 마지막을 별 넷짜리 호텔로 화려하게 마무리하는구나. ㅋ ㅑ
짐을 풀었다. 샤워를 했다. 방 내부가 다르다. 이건 정말 방 내부가 다르다. 그동안 궁상 떨었던 별 하나짜리 호텔과는 격이 다르다. 일단 방 키부터가 구조가 이건 정말 다르잖아! 조그만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음료수가 종류별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침대 이불은 깨끗했고 시트는 정말 푹신포근했다. 우린 샤워를 하고 70유로 결제지를 들고 호텔 식당으로 갔다. 용지를 보여주자 직원은 먹고 싶은 걸로 마음껏 먹으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우린 그날, 훈제 연어(살살 녹는다)에 각종 육류와 생선 요리, 달콤한 디저트의 만찬을 즐겼다. 부른 배를 토닥이며 방으로 돌아오는 시각 저녁 11시.
양치를 하고 침대에 엎드려 있자니 하루종일 정신없이 이리 저리 뛴 덕에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유럽에서의 밤 11시. 한국 시각으로는 아침 6시. 부모님은 6시간 반이 지나면 한국땅을 밟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계실 터였다. 사실 경황이 없어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본 석양빛은 정말 예술적이었다. 배가 부르고 따땃한 곳에 몸을 누이니 이제야 그 생각이 난다. 내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은 후 6시 15분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일찌감치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가기로하고 잠을 청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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