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는 패션의 중심지이니만큼 관광객도 바글거리고, 숙박비도 비싸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관광객이 다른 도시에 비해 확연히 적었다. 내가 보기엔 다른 도시에 비해 볼거리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당연히, 그만큼 숙박비도 저렴한 편이었다. 우린 별 셋짜리 호텔에 방을 잡고 잠을 청했었다.
오전 7시 30분에 아침을 먹었다. 별 셋짜리 호텔이라 뭔가 더 좋지는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메뉴는 별 하나나 두개짜리 호텔과 차이가 없다. 마들렌을 곁들인 카푸치노를 마셨다. 혹시 오전 9시 10분 열차 여석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양치를 하고 밀라노 중앙역으로 갔다. 딱 1자리가 있었다.
"그래 형이 먼저 가서 파리에 자리를 잡아두고 있을게!"
"아냐 형아 *^^* 내가 먼저 가서 형 오면 편하게 쉴 수 있게 기반을 닦아놓고 있을게"
제 몸만 편하려는 이기적인 두 형제에게 타협은 없었다. 둘 다 그냥 오후 늦은 시각 열차를 타기로 했다. 매표원 컴퓨터 화면을 훔쳐보니 결제수단이나 할인 적용 구간 별로 좌석이 할당되어 있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결제수단을 card로 설정했을 때는 여유좌석이 3개였던 것이 Global Pass로 옵션을 바꾸자 여유석 1로 숫자가 바뀌었다. 호텔까지 막 뛰어갔다 오는데에 15분은 걸릴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8시 55분에 다시 한번 최종적으로 9시 10분 자리가 있는지 체크를 해보았다. 여유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16시 10분 열차를 타기로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11시정도에 터키쉬 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밀라노에서는 온종일 케밥만 먹는 느낌이다. 케밥이라는 음식이 그만큼 우리 입맛에 잘 맞았다. 느끼한 음식만 먹다보니 그나마 손이 가는 음식이 살짝 매콤한 케밥이라 그런 것 같다. 어제 먹은 방글라 케밥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라면 터키쉬는 매콤하고 화끈한 느낌이다.
오전 11시 30분이 호텔 체크아웃 시간이라 모든 짐을 정리해 밀라노 중앙역 예약 코너의 의자에 털썩앉아 4시간을 보냈다. ← 제길 이렇게 무덤덤한 한 문장으로 달랑 표현하기엔 당시 내가 겪은 지루함을 제대로 전달 할 수가 없다 ㅜㅜ
4시간이 넘도록 사람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동생은 번호표를 몇 개씩 미리 빼두었다가 자신이 뽑아둔 번호표 차례가 임박해오면 나이가 드신 분이나 인상좋은 여행객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번호표를 받아든 사람들은 당연히 좋아라 한다. 번호표를 막 뽑으면 보통 대기인원은 80명정도고, 40명이 줄어드는 데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된다. 우린 이름하여 '행운의 쪽지' 전달 서비스를 4시간동안 하고 앉았던 것이다.
그런데 번호표 선물을 받은 사람들 중 아무도 선물이나 먹을 걸 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린 동생. 바랄걸 바래야지. 그렇게 4시간을 보내고 저녁 도시락으로 케밥을 준비했다. 일지 내용을 바탕으로 여행기를 적다보니 정말 대단하다. 난 밀라노에 있을 때 이틀에 걸쳐 계속 케밥만 먹어대고 있었다. 분명히 난, 언젠가 터키 여행을 하더라도 음식때문에 투덜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케밥과 함께 포만감을 더해주고 행복감을 선사해 줄 물과 음료, 과일 조금을 더 사 열차에 올라탔다.
의자가 2:2로 마주보고 가운데 테이블이 있는 객석이 우리가 예약한 자리였다. 맞은편에 말끔한 정장을 입은 루마니아계 백인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오옷. 그런데 이 사람 한국에 와본적도 있고 단군 신화는 조금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 아예 스토리 전반을 꿰고 있다. 영어 발음이 꽤나 알아듣기 쉬워(이정도로 알아듣기 쉬운 영어는 영국인과 스위스 호텔 보이 외에 없었다) 언제 얼마나 영어를 배웠냐고 물었다.
의무교육기간에 공립학교에서 1년 배운게 전부라고 한다. 제길. 루마니아어는 어순이 유럽계통 언어나 영어와는 다르다고 알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거지-_- 차마 한국인들은 의무교육기간 동안 영어를 얼마나 배우는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Mr. 루마니아 씨는 불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도 할 줄 안다. 그사람은 1시간동안 수다를 떨다가 한 잔 한답시고 Bar 칸으로 갔다. 이탈리아어밖에 할 줄 몰라 우리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던 흑인 청년이 흥미로운듯 내 론리플래닛을 계속 뒤적이고, 한글로 글 쓰는 모습을 지켜본다.
루마니아 아자씨가 다시 돌아와 우린 간단한 루마니아어를 배웠다. 생활 표현과 발음, 강세를 배우는 것을 옆의 흑인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물론 지금은 그 때 배운 루마니아어 표현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내 루마니아어 발음 퍼펙트하게 따라오고 있다고 칭찬받았었는데, 쩝. 이름을 교환했다.
어쩌다보니 유럽을 여행하면서 파워에이드 병 4개가 모였다. 테이블 위에 4개를 올려두니 루마니아 씨가 탕탕 총 쏘는 시늉을 한다. 난 외쳤다.
"이눔자슥(내동생을 가리키며) 취미가 파워에이드 병 수집입니다."
항상 내 장난끼에 당하곤 하는 내 동생은 이번에는 그렇게 졸지에 파워에이드 병 수집가가 되어버렸다. -_- 루마니아 씨는 웃음을 터뜨렸다. 동생이 한국말로 아니라고 했지만 루마니아 씨가 알아들을 리 없다. 여행자 루마니아 씨의 그날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오늘 파워에이드 병을 수집하는 괴상한 한국 여행객을 만났다.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프랑스 농가 풍경이 보인다. 선로가 가까이에 있어 집과 그 주변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탈리아 말을 쓰는 흑인이 여권 검사를 하는 타이밍에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여권이 없다거나 뭔가 구린 데가 있는 녀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밀라노에서 미켈란젤로 상이 있던 깔로 광장에있던 여자상에 누군가 사정없이 그래피티를 남겨 오늘자 메트로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질로 본 것이라 아쉽게도 그 사진은 찍지 못했다>
저녁 9시가 지나자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둑어둑해지는가 싶더니 금새 깜깜해졌다. TGV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고 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자뭇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면 맞은편 루마니아 씨가 웃으라며, 조금만 더 가면 파리라고 장난을 걸어왔다.
우측 건너편 흑인 아주머니가 자꾸 시간을 물어보는데 영어로 말해주면 못알아들어서 그 다음부터는 시간을 물어볼 때마다 아예 손목시계를 풀어서 보여줬다. 열차가 파리에 가까워올 때 멀리서 불꽃을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포화들이 보였다.
마침내 열차가 리옹역에 도착했다. 루마니아 씨는 선물이라며 이탈리아 축구 기념 카드를 줬다. 나도 그에게 기념 주화를(한국돈 새로나온 10원-_-) 건넸다. 이메일을 교환하고 헤어졌다.
지하철 싱글티켓은 가이드북(대체 2007.5월 개정판이 뭐 이래)에 나온 가격보다 더 올라 1.5유로였다. 리옹역에서 루브르 근처로 이동했다. 파리 지하철 지저분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는데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깨끗하고 디자인(디자인이라는 어휘를 쓸 정도)도 근사했다(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최근 개통된 14호선을 타서 그렇게 느낀 것이었다). 열차 자체도 그동안 타본 유럽 지하철 중 가장 깨끗했다.
문제는 루브르 근처에 내려서였는데, 호텔도 얼마 없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내일이 국경일이라 축제가 있다고 한다. 12시가 넘은 시간까지 빙빙돌아 간신히 한 곳에 짐을 풀었다. 시설은 낡을대로 낡았고 너무 비싸다. 별 하나짜리 호텔이지만 밀라노의 별 셋짜리 호텔보다 가격은 더 비쌌다. 별 하나짜리 호텔이지만 별이 없어도, 유스호스텔이어도 이것보다는 시설이 좋을 듯 싶었다. Breakfast 따위 제공하지도 않고 침대는 단 하나(이 좁은데서 남정네 둘이 잠을 자라고?), 샤워실은 비좁다. 샤워커튼을 쳐도 물을 바깥으로 들쳐 샤워를 하고나면 화장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다만, 잠깐이나마 접한 파리의 야경은 최고였다. 가로등 조차도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디자인을 뿜어내고, 도로 안전막 디자인도 인상적이다. 도시를 꾸밀 줄 안다는 인상이 든 건 유럽을 여행하면서 처음 가져 본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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