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온 이후로 언제나 그렇듯, 까페라떼와 크로아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흔히 먹는 아침식사 스타일에 익숙해지고 있다. 평소 아침밥은 꼭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장되어있어 학교에 지각하는 한이 있더라도 뜨끈한 국밥 한그릇은 뚝딱 해치우고 다니던 때를 떠올려보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피쩨리아에서 으깬 감자를 얹은 피자를 사서 떼르미니 역으로 향했다. 열차에 올라 컴파트먼트 칸에 앉아 문을 닫아두고(냄새가 복도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열심히 피자를 먹고 있는데 왠 여자가 오더니 자리 예약을 했다는 거다. 당황한 나머지 우린 먹던 피자를 도로 포장해서 옆 컴파트먼트 칸으로 옮겼다. 부러 문도 꼭꼭 닫고 먹던 칸이라 우리가 간 후에도 한동안 피자 냄새 꽤나 났을텐데 내심 미안했다. 우린 유레일패스 소지자라 IC열차를 탈 때는 따로 좌석을 예약할 필요가 없었다. 이탈리아 내부를 여행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열차로는 ESI, IC+, IC가 있다. 그 중 IC를 제외한 나머지 두 열차는 유레일패스가 있다하더라도 대략 두 당 ESI는 15유로, IC+는 5유로의 추가예약비가 들기 때문에 IC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대에 맞춰 떼르미니 역으로 간 것이었다.
꼭 다시 한번 먹어볼테다. 떼르미니 역 근처>
'아빠 고마워요! 웨스턴유니온 덕분에 여름캠프에 등록할 수 있었어요^-^'라고 적혀있던 광고물이 떠올
라 동생과 둘이 그 광고문구를 읊으며 연신 웃어댔다>
맞은편 의자를 당겨 침대처럼 발을 걸치고 앉아 남은 피자와 사과를 먹고 나폴리까지 갔다. 한 입 베어물 때 아삭- 하고 신선한 느낌으로 사각거리는 사과를 먹고 싶어 마트에 갈 때마다 여러 종류의 사과 중 한 종류를 두 알씩 구입하곤 했었다. 그런데 첫번째 시도였던 Golden Apple에 이어 구입한 Green Apple도 아삭한 사과가 아니라 으스러지는 느낌의 사과였다(난 이렇게 으스러지는 느낌의 사과가 정말 싫더라). 사과를 어거지로 베어먹으며 생각했다.
"아삭한 느낌의 사과 고르는 방법을 알고 싶다."
기차가 달려 나폴리에 도착했다. 이제 나폴리에서 폼페이로 이동해야 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지방철도를 이용하는 법,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국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방철도는 유레일패스 소지자도 돈을 더 내야하고, 국철은 유레일만 소지하고 있으면 된다길래 인포메이션 센터로 가 폼페이 가는 국철 타는 곳을 물어봐 국철 탑승칸으로 갔다. 이지유럽에는 지방철도 타는 법만 설명되어 있고, 론리플래닛에는 아예 나폴리에서 폼페이를 향한 교통이야기가 실려있지 않아 다소 불편했다.
우린 에어컨도 없고,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는 사우나 같은 국철 안에서 비지땀 제대로 흘리며 폼페이에 도착했다. 가이드북(2007년 5월 최신개정판인데 가격 표기를 개정 안했으면 대체 뭘 개정한거지)에는 입장료가 10유로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새 1유로가 올라 11유로였다.
폼페이에는 기원전 6세기부터 도시가 있었다고 추측된다. 로마 귀족들의 방탕한 휴양지였고 동시대 다른 도시에 비해 매우 발전된 곳이었다. 얼마나 방탕하고 타락한 곳이었는지는 루파나레Lupanare를 가보면 알 수 있는데 루파나레는 창녀들의 방이 있었던 곳이다. 이 방들 벽에는 민망하고 적나라한 그림이 한가득해 타락한 폼페이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항상 운집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인기 방이다. 타락한 휴양지였던 이 도시에 서기 79년 8월 24일, 사화산이라고 생각했던 베수비오 산이 엄청난 규모의 폭발을 일으켜 도시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도시 전체가 6cm 두께의 화산재로 덮여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고 묻혀버린 것이다. 그 후 전설 속의 도시로 사람들에게 전해져내려오던 중 1784년 실재했던 도시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발굴작업은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부터 이루어져 아직까지도 한창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역사 속의 도시 폼페이를 둘러보고 숙소로 오는 길에 너무나 배가 고파 맥도날드에서 빅테이스트 세트를 사먹고 말았다. 한국에서도 먹어볼 생각을 한 적이 없는 바로 그 빅 테이스트(먹을만 하더라). 콜라에 얼음없이 콜라만 잔뜩담아달라고 해 남김없이 모두 먹고 마셨다.
로마에서는 다른 도시에 비해 오래 머무르다보니 론리플래닛의 진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있다. 이지유럽이 사진도 많고 편집도 깔끔해 가독성을 높이고 있어 국내 여행가이드북 시장을 석권하고는 있지만 역시 전세계적으로 검증받은 론리플래닛에는 그 내공이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론리플래닛은 사진이 거의없고 조그만 글씨가 빼곡한 대신 알짜배기 정보가 무수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방대한 정보량은 이지유럽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지유럽은 보통 아무리 큰 도시라도 2-3일 내에 굵직한 유적만 모두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어 짧은 기간 주요 유적지만 얼른얼른 돌아보는 식의 여행을 하거나, 유럽에 처음 발을 내딛는 여행자들에게 적합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머무르거나 방문횟수 두 번이상을 채우는 이들에게는 빈 공간도 많고 상대적으로 내용이 빈약한 이지유럽대신 론리플래닛이 훨씬 매력적일 것이다.
런던에서부터, 브뤼셀, 스위스 정도까지는 지인의 강력추천으로 챙겨든 론리플래닛보다는 이지유럽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여행을 다녔었는데 오늘은 열차 이동하는 많은 시간동안 오로지 론리플래닛만 붙들고 있었다.
폼페이에서 나폴리로 이동하고 나니 나폴리에서 로마로 이동할 열차 시간이 급박했다. 당시 시각은 7시 18분이었고 IC+가 7시 22분과 7시 36분에 있었다. 표를 사기 위해 자동티켓기에 섰는데 명 당 29유로의 요금을 내야한다고 뜬다. -_- 유레일패스 소지 할인이 적용되지 않은 것이다. 유레일패스 소지 할인을 받기위해서는 창구에서 구입해야 한다길래 급한 마음에 얼른 창구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어 시계를 보니 시각은 7시 22분. 22분 열차는 어차피 놓칠 듯해 그냥 36분걸 달라고 하면서 유레일패스 소지자임을 밝혔더니 유레일패스를 보자고 해서 주섬주섬 꺼내고 뭐하다보니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헉 그런데 7시 36분 2등석 표가 모두 팔렸댄다. 이런 상황이 생길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동생과 나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하고 있는데 22분 열차 2등석 표는 남아 있단다.
아직 출발하지 않은걸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입은 이미 제멋대로 "OK, I'll take it!"을 외치고 있었다. 표를 받아들면서 생각했다. 그래 보통 이탈리아 열차는 5분이나 10분 연착은 일상다반사니까 잘하면 탈 수 있을거야. 내 손은 이미 주머니에서 예약비 5 X 2 = 10유로를 꺼내 내밀고 있었다. 표를 받아들고 우린 정신없이 뛰었다. 열차타는 칸에 도착했는데 아직 열차는 오지 않았다. 시각은 33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란발권기에 표를 집어넣어 체크하고 들어오는 열차칸에 올라탔다.
'우린 해낸거야!'
헉 그런데 컴파트먼트를 찾아갔는데 내 예약석에 누가 누워자고 있었다. 구두인지 신발인지 구분이 가질 않은 더러운 신발마저 벗고 있는데 컴파트먼트 문을 여는 순간 발 냄새가 확 콧속으로 들어와 얼굴을 찡그리며 문을 닫아버릴 뻔 했다 -_-
내 자리임을 설명하고 앉았는데 그 사람은 내 옆에서 계속 창가에 기대 잠을 청하는데 냄새는 멈출 새 없이 계속 풍겼다. 이 밀폐된 공간에서 요 냄새 포자들이 계속해서 내 허파에 들어가 흡착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매우 불쾌-_-했다. 그렇게 30분정도 지나니 후각기관이 환경에 적응해버려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마비된건지도 ...
동생과 한국말로 쑥덕였다.
'아 이 냄쉬 참을 수가 없어(나)'
'냄새 대박! 아놔, 지금 나랑 싸우자는건가?(동생)'
이 와중에 동생이 갑자기 한쪽 엉덩이를 살짝 들더니 잠시-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헉, 설마- 이 녀석. 내 옆에 거의 엎어져 있는 아저씨와 함께 날 죽일셈인가. -_-
그렇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놈의 생리현상.
냄새에 냄새가 더해진 지상의 하모니와 함께 열차는 로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거의 혼수 상태.
Conad에서 파인애플과 멜론을 사다 먹고 요거트를 사다 먹었다. 건강한 장을 위한 매일매일의 비타민과 유산균 보충이다. 매일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이정도는 해야 상쾌한 쾌변(응?)과 함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피부관리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오 마이 갓. 난.. 살이... 쪄가고.. 있다. 2주가 넘도록 고단백 고지방 음식으로 만찬을 즐겼더니 배는 올챙이 배가 되어간다.
Pera라고 적힌 주스는 실패한 선택으로 돌아갔다. 대체 이 걸쭉한 맛은 무어란 말인가. 무슨 과일인지도 모르겠고 당췌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우겨 구입한 쥬스. 일말의 책임감을 통감하며 내가 모조리 마셔버렸다. 억지로 마신 다량의 과즙으로 꿀렁거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자신의 언행에 이만큼의 책임을 진다면 좀 더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유럽여행이 20여일에 달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여행의 매력.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구나- 싶은. 지금 한창 여행을 즐기고 있는 순간이면서도, 한국에 돌아가면 유럽을 그리워하고 있을 내 모습이 벌써 상상된다.
다음번에는 꼭 사랑하는 이와 유럽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지내다 보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외국어 공부에 더 힘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독일에서는 벤츠와 BMW가, 이곳에서는 유독 페라리와 푸조가 눈에 많이 띈다. 동시에 구걸하는 이들의 모습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심한 빈부격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광경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 볼 수록 한층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겨난다.
내일은 론리플래닛에 소개된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매일매일,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여행의 매력과 그 진미에 빠져들고 있다.
P.S. 일주일이 넘도록 면도를 하지 않고 돌아다녔더니 고개를 숙이면 턱수염이 자꾸만 목을 찔러대 결국 참지못하고 면도를 싹싹 해버렸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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