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은행없는 도시가 어디있겠어, 게다가 여긴 로마 한복판이라구!'
이번엔 틀림없겠지 싶은 마음으로 경찰에게 다가가 은행을 물어봤다. 헉, 은행이 어디있는지 모른댄다. 하긴 그러고보니 몇 일간 로마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은행 코빼기도 본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다들 현금카드를 만들거나 펀드 계좌를 개설할 때는 어디로 몰려가는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거리에 있는 ATM에서 돈을 인출하기로 했다. 굳이 은행을 찾아 은행 안에 있는 ATM에서 돈을 인출하려는 이유는 안전상의 이유도 있거니와 400유로를 인출했을 경우 아마도 100유로 짜리 지폐 4장이 달랑 나올테니 즉시로 은행창구로 가서 10, 20유로 짜리 지폐로 쪼개려는 이유에서였는데 여기에는 은행이 없으니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100유로짜리 지폐를 턱- 내밀며 요구르트 한 개라도 사야할 판이었다.
그런데, 요놈의 ATM이 참 센스있는 녀석이었다. 400유로 인출을 요청했는데 50유로와 20유로 지폐를 다양하게 섞어 뱉어냈다. 오호라- 이거 센스있는 물건이로세.
지오반니 파시에서 젤라또 한 그릇씩을 들고 나왔다. 1880년부터 12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곳은 언제나 신선한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어 현지인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젤라또를 주문하고, 그릇단위로 포장해가고 있었다. 난 멜론, 코코넛, 루비자몽 맛을 선택했다. 코코넛 맛 아이스크림에는 진짜 코코넛을 듬뿍 갈아넣어 그 알갱이가 씹혔다. 차갑게 해 둔 크림을 젤라또 위에 얹고 길다란 과자를 크림 위에 박아준다. 크림이 차가워 시원한 청량감으로 다가오고 끝맛은 부드러워 흡족하다. 하지만 12시 14분 열차시간이 아슬아슬해 우린 미처 점심으로 먹을 피자조각을 사지 못한 채 간신히 열차칸에 올라섰다. 2시간 반은 가야 아씨씨에 도착할터라 상당히 난감했다.
우린 아씨씨에서 표를 2장 사고 버스를 탔다. 길게 펼쳐진 해바라기밭이 장관이다. 잠시나마 한국의 모든 해바라기씨 과자의 원료가 여기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서 해바라기 재배의 주 목적은 해바라기씨유를 만들기 위함이다. 도심지에서 떨어질 수록 요리에 해바라기씨유를 많이 곁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특히 샐러드에 해바라기씨유를 넣으면 그렇게 맛이 좋다나-
아씨씨는 성 프란체스코의 고장이며, 이탈리아 중부 소도시의 목가적인 풍경과 중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산 위의 도시이다.
아씨씨의 이름 모를 피자테리아에서 조각피자를 먹고 아씨씨를 둘러보았다. 피자를 주문하고 나서 주인 아저씨가 뭘 보러 여기까지 올라왔냐고 물었고,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들르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물론 아저씨는 이탈리아어로, 나는 영어로. 서로 의사전달이 제대로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대화는 여기에서 그쳤다. 한국 가면 이탈리아어 공부 좀 해야지(막상 한국 와서는 이탈리아어 공부할 의지가 전혀 생기지 않음). 정상에서 본 정경이 장관이었다.
성당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는 압도감이 있어 숙연해진다. 곳곳의 벽화와 성화는 성경 곳곳의 구절과 말씀을 상기시켜 기도를 하다 가고 싶은 마음이 밀려오게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화려함이나 기교가 지나치다 싶은 장식은 경외감을 넘어 압도감을 느끼게 해 마음 한 편이 불편해왔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대해 이지유럽은 따로 복장 규제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고, 론리플래닛에서는 '옷을 단정히 입는 것이 좋다' 정도의 권고에 그치고 있었는데 어깨가 드러난 원피스를 입은 한국 여행객 두 명은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아씨씨에 오면서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들어가보지 못한다면 이곳에 온 의미가 없을텐데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성당과 같은 곳에 오면서 지나치게 천 면적이 좁은 옷을 걸치고 질질끌리는 슬리퍼 차림으로 입장하려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다.
측에는 그 이후가 그려져 있다. 위쪽 성당에 있는 프레스코화는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28개의 작품으
로 표현한 것이라는데 난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성 프란체스코에 대해 아는 배경
지식이 전무한 편이라 그런 듯. 난 지금도 그가 아씨씨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정도밖에 모른다>
아씨씨 이곳 저곳을 네시간에 걸쳐 모두 돌아보고는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이제는 떼르미니 역과 그 근방이 무척이나 친근하다. 우리는 로마에 온지 채 일주일도 채우지 않은 주제에 로마 떼르미니 역에 도착하면 언제나 이렇게 외친다.
"역시~ 집이 제일 좋구나~ 우리 동네다~"
나도 안다. 우린, 우리가 봐도 웃긴 녀석들이다.
Conad에서 색다른 모양의 피자를 사먹었는데 기름투성이였고 느끼했다. 로마에서는 숙소 옆 피자테리아에서 살 수 있는 으깬 감자를 듬뿍 얹은 피자만한 것이 없다. 피자라면 이 곳이 정말 강력추천. 떼르미니 역에서 Sma 가는 길 왼편에 있는 피자테리아 가게. 로마 최고의 조각피자 맛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다 맛있는 건 아니고 그 중에서 으깬감자가 듬뿍 올려진 녀석을 원하는만큼 잘라줄 것을 요청하면 무게를 달아 포장해준다. 난 이 다음에 로마에 다시 와도 꼭 이 녀석 맛을 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할 예정이다. Conad에서 구입한 이탈리아 산 콜라 맛이 독특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엎드려 일지를 쓰고 있자니 이제는 점점 여행에 익숙해져가는 느낌이다. 만 22년동안 한국에서 어른들로부터 보고 들으며 자란, 소위 말하는 '모범적인', 혹은 '정답에 가까운' 삶이란 '~한 것'이라는 관념의 틀이 깨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더라도 진짜 나를 찾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정답일게다.
맛깔스럽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한 론리플래닛이 재미있게 읽힌다. 불과 2주 전만해도 사진이나 그림은 거의 없고, 글씨막 빼곡한 이 여행가이드북을 가져온 것을 잠시나마 후회하기도 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지유럽보다 한층 더 깊이가 있다. 당일치기나 1박 2일 정도의 여행으로는 론리플래닛과 이지유럽의 차이점을 도무지 느끼지 못했지만 로마에 주욱 머무르다보니 이제야 두 가이드북의 깊이가 어림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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