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에서 호텔팩이나 호스텔팩을 선택해 여행을 하다보면 일정에 쫓기는 결과를 불러온다. 굳이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더라도 일정표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 생활상이 쉬이 짐작이 간다. 가령 29박 30일 여행일정 중 9박정도가 야간열차 이동으로 설정되어 있는 식이다. 여행사 패키지 가격이 낮을 수록 야간열차 이동 횟수는 증가한다. 밤새도록 흔들리는 열차에 시달리고, 도둑이 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보면 다음날 아침 도착한 도시 관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어떠한 풍광이나 유적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질 않는 건 당연지사.
직접 현지 체류를 하다보면 좀 더 머무르고 싶은 도시도 있고, 생각보다 내게 주는 매력이 없어 근교 도시로 일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다. 자유여행의 매력은 그런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유럽 지도 한 장 펴놓고, 유레일 타임 테이블(각 국 내 외를 잇는 유럽열차 총괄 시간표)을 뒤적이며 열차 시간을 확인하고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넓은 '융통성'에 있다. 내 여행도 '우린 이런이런 나라를 여행한다'는 개괄정도만 세우고 출발한 것이었고 각각의 도시 방문 계획은 소소한 순간마다 계획한대로 진행하기도 하고, 다른 여행객의 말을 듣고 즉흥적으로 루트를 바꾸기도 했다.
좀 더 머무르고 싶은 도시에 와있는데 여행사가 정해준 일정과 기차 시간, 이미 여행사에 의해 에약된 호텔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기차에 오르며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다면, 어쩌면 그건 이미 여행이 아니다. 여기 찍고 턴, 저기 찍고 턴- 하는 확인작업자로 전락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고생해 번 돈으로 직접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모양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보겠다는 데 내 취향, 내 성격, 내 선호도나 여행의 테마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짜준 스케줄에 내 온몸을, 그리고 내 귀중한 한 달의 시간을 통째로 내어 맡기는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항공권 하나만 달랑 사 배낭을 메고 출발하는 여행을 꿈꿨고, 그걸 그대로 시행했다. 7월 6일. 이날은 몇 일간 하루종일 열차이동을 하고 온 도시의 유적을 헤집고 다니는 강행군을 했기 때문에 푹 쉬고 한껏 게으름을 피우기로 한 날이었다. 동생은 잠을 더 자겠다고 내버려두라고 이야기해서 아침을 혼자 먹었다. 까페라떼 한 잔에 크로와상을 먹고 눈 앞에서 기계로 막 짠 신선한 오렌지쥬스와 딱딱한 호밀빵을 먹었다. 아침 식사로 오렌지쥬스와 호밀빵, 크로와상을 먹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에 혼자 로마 시내를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녔다. 카메라도, 가방도 없이 티셔츠 한 장, 카키색 카고 바지 하나에 스위스에서 산 퓨마 조리를 신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다니자니 그이상 편할 수가 없다. 어떤 도시를 들르더라도 몇 일이 지나면 그 도시의 체계와 내음,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익기 시작하고 조금이나마 마음 한 데 있던 불안감은 말끔히 사라지곤 한다. 이 곳에서도 그렇다. 로마 시가지가 서울 시가지처럼 편하고, 악의 없는 사람들의 장난이나 농담도 편하다. 베네치아로 이동하는 열차에서 동생이 곯아 떨어진 동안 졸린 눈을 비비며 애써 외운(이탈리아로 이동하는 구간은 좀도둑이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컴파트먼트나 쿠셋의 경우 단순 절도에 수면크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이렇게 동생이 세상모르고 '날 잡수쇼'식으로 잠에 빠져버리면 난 영락없이 잠 한 숨 못자고 있을 수밖에) 간단한 이탈리아 회화를 써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매일 아침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기 위해 들르는 전화방 청년과는 밥은 먹었냐는 인사를 주고 받을 정도.
북을 손으로 두들기며 신나게 노래하는 거리의 악사가 있다. 아무도 오가는 이가 없는데 한껏 신이나 연신 북을 두들긴다. 주머니에 잡히는 동전은 한국동전밖에 없어(외국인와 이야기하다보면 하나씩 기념으로 주곤했다. 별다른 기념품을 챙겨갈 생각이 없다면 한국동전 괜찮다) 던져주었다. 이건 한국동전인데 기념으로 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도 내게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줬다. 아- 이걸 내가 어디다 쓰라는 거.
장터가 열려 있어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만지작거렸다.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과 공간을 체험해볼 수 있어 기분이 참 좋다. 유럽의 물가가 비싸다지만 생필품은 질이 조금 떨어지는 경우 오히려 파격적으로 저렴한 경우가 많다. 면 재질이 그다지 좋지는 않은 티셔츠 한 장이 우리돈 2천원 정도에 팔리고 있었다. 합성고무로 만든 조리 역시 2천원이다.
이곳은 매일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창공은 파란물감을 푼 듯 새파랗기만 한데, 한국은 우리가 유럽으로 온 이후 계속 흐리거나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전화비가 유럽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말은 맞는 말 같다. 베네치아에서도 경험했지만 국제전화카드를 사도 순식간에 다 써버리는 통에 몇 장을 구입해 전화를 했는지 모른다. 영국의 물가를 뛰어넘는 듯한 스위스만큼이나 전화비용은 비싼데 통화품질은 이제까지 경험한 유럽 공중전화 시설 중 최악이다. 시설이나 외관은 둘째치고 통화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공중전화 품질은 스위스만한 곳이 없다. 한국에서 전화통화하는 것마냥 생생하게 잘 들려왔던 스위스의 공중전화. 로마에 와서는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호텔 근처에 있는 인터넷 전화방을 한 군데 찾아 덕분에 좀 더 편히 전화를 쓰고 있다.
여기에서는 네모낳고 길게 구운 피자들이 진열된 곳에서 원하는 만큼의 피자를 주문하면 즉석에서 잘라 무게를 재 가격을 매겨 파는 피자테리아들이 있다. 오늘 고른 피자는 으깬 감자가 올려져 있어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맛이 풍부해 마음에 들었다. 혼자만 맛보기엔 심하게 맛이 좋아 배가 아파 점심을 거르겠다던 동생에게 권했는데, 한 입 먹더니 이내 한쪽을 다 먹어치웠다.
동생은 계속 숙소에서 잠을 자고 쉬고 싶어하는 듯 했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콜로세움을 보고 돌아왔다. 로마는 분명 유적지로 가득찬 역사의 도시에다, 많은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싶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매력적인 도시다. 물론 나 역시 이 도시에 꽤나 매료되었지만 이상하게 난 이 도시에 오랜 시간을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과연 그리워하고 다시 오길 고대하는 도시 목록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일지에는 이렇게 적어두었었는데, 한국에 온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이 순간 난 로마가 정말이지 너무나도 그립다). 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자꾸만 생각나는 곳은 브뤼셀의 그랑팔라스다. 그 활기찬 사람들, 늦은 시각까지 시끌시끌 먹자골목 가득한 홍합요리 냄새까지 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브뤼셀에 대한 아쉬움이 잔상으로 떠오른다.
어제 잠깐 작동을 멈추었다가 고쳐진줄로만 알았던 동생의 디카가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이다. 디카를 들고 혼자 무언가를 보러 나갔던 동생이 풀이 죽어 돌아온다. 속상해하는 동생을 보니 내 마음이 쓰리다. '기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데 카메라가 고장나 시각의 기록을 할 수 없게 된 동생의 마음이 어떠할지- 착잡하다. 어차피 사진으로는 우리가 보고 접하는 그 순간의 느낌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고, 이제부터의 여행은 가슴에 담으라고는 위로해줬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라도 카메라가 고장나 앞으로의 여정을 사진으로 남겨둘 수 없게 되면 한참을 넋이 나가 있을 것 같으니까. 형이 네 몫까지 좋은 사진 많이 찍어두겠노라고 다독이고 같이 콜로세움의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저녁거리로는 아까 그 피자테리아의 포테이토 피자와 이탈리아 콜라, 열대과일 쥬스(과즙 100%), 모듬과일 3.49유로어치를 사다 먹었다. 열대과일 쥬스가 너무 톡 쏘는 느낌이라 자극적이었다.
찬란한 야경의 콜로세움에서는 도처에서 연인들의 애정행각을 목격하게 된다. 내일은 나폴리에 갔다가 120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젤라테리아 집에 들러 젤라또 한 그릇씩 먹고 오려고 한다. 나는 이 날 호텔방에 돌아와서 '부모님, 한국 음식, 그리고 내 사람들도 그립다'- 고 적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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