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에 타고 나서야 깨달았는데 우리는 열차에 오를 생각만 했지 점심을 준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후 늦은 시각에야 로마에 도착할 걸 뻔히 알면서, 대체 왜 점심을 준비할 생각을 안했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우린 로마까지 가는 길 내내 열심히 젤리와 리콜라(사탕)를 열심히 빨아먹으며 버텼다.
사실 이탈리아의 농가 전원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는데 그 낭만적인 상상 속 그림은 실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여지없이 깨졌다. 물론, 이탈리아 농가의 모습도 멋지긴 하지만 이탈리아 방문에 앞서 스위스를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이탈리아 농가의 풍경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스위스의 풍경에는 도무지 미치지 못하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좀 더 신랄하게 표현하자면 집들의 모양을 제외하면 한국의 농가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스위스에서는 기차를 탈 때 창가에 꼭 붙어 정경을 보고 있었는데 이탈리아 구간 이동 시에는 가만히 앉아서 갔다. 그리고 지루함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는 피렌체를 거쳐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에 대해서라면 우선 온갖 가이드북과, 주변인들에게 하도 많이 들어온 소매치기와 집시들이 떠올랐다. 방문할 국가와 도시 중에 로마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여행을 자주 다니는 누님 한 분은 소매치기를 꼭 조심하라는 당부만 남겼다. 하지만 로마에 대한 첫 인상은 이제까지 거쳐온 다른 기차역들과 전혀 차이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일단, 우중충하고 지저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나름대로 상상해왔던 로마 떼르미니 역과는 영 딴판이다. 덧붙여, 하필 로마에 발을 처음으로 내딛은 날 날씨까지 화창하지 않아 우중충한 첫인상에 한층 더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떼르미니 역은 1951년에 완공되었고 그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절제된 미를 갖춘 합리주의적인 건축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떼르미니(Termini)라는 말은 작은 목욕장들이라는 뜻으로 고대 로마 목욕장 유적 사이에 지어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29개나 되는 플랫폼과 도처에서 온 관광객과 집시들의 행렬에 혼잡스럽기만 했다.
떼르미니 역 근처에는 저렴한 가격의 호텔이 많아 금방 방을 잡았다. 내가 리셉션 데스크의 금발 누나(?)와 방 값을 조금이라도 더 깎기 위해 흥정하고 있는 동안 그 금발 소녀(?)의 웃음에 덩달아 알 수 없는 수줍은 미소를 짓는 동생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캐치했다.(대화하고 있는 건 난데 왜 이녀석이 수줍어 하면서 웃는거-_-;) 역 근처에 숙소를 잡아 다행이었다.
짐을 풀고 카메라를 들고 콜로세움에 갔다. 콜로세움은 로마를 온몸으로 대변하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콜로세움 주변은 언제나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로 번잡함을 이룬다. 그래서 그런지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가는 긴- 줄이 인상적이었다. 이지유럽과 론리플래닛 둘 다 콜로세움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여행객들에게 가장 마음에 와닿을, 그러면서도 앞으로도 유용할 구절은 바로 이 부분이다.
황량한 내부는 볼 것이 없으니 입장료를 내면서 들어갈 필요가 없다. - 론리플래닛
짧지만 정말 강한 뉘앙스를 내포한 문장이다. 집필진이 아마 콜로세움에 돈주고 입장했다가 '젠장' 혹은 '제길' 같은 육두어를 내뱉는 경험을 한 게 아닐까 싶은 간결한 평이 아닌가. 앗, 그런데 안내판을 보니 오늘은 콜로세움이 가리발디 탄생 기념일이기 때문에 입장이 무료란다. 우린 정말 기분좋게 입장권을 받고 콜로세움 안까지 구경했다. (론리플래닛에 적힌대로 콜로세움 안은 볼게 없었다. 제값주고 입장했었으면 돈 아까워했을 듯. 정말 볼 거 없다)
오늘날 로마에서 보는 콜로세움은 본래 모습의 1/3이 채 되지 않는 모습으로 그 안쪽 또한 살점이 다 떨어져나간 뼈대만을 보여주고 있다. 콜로세움은 초창기에 완벽한 배수시설을 갖추고 경기장에 물을 채워 '나우마키아'라고 하는 모의해전을 즐기는 장소이기도 했고, 검투사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보여준 그 검투사 시합 말이다. 본래 검투사 시합은 에트루리아에서 시작된 종교 의식이었지만 로마에 건너와 그 의미가 변형돼 전문적인 검투사들이 양성되고 많은 검투사들이 희생되었다. 글래디에이터가 개봉되었을 때 황제가 직접 검투사 시합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일각에서는 "영화니까 그렇지, 실제로는 어떻게 황제가 검투사 시합에 참여하나"라는 식의 논리가 횡행했지만 그건 로마의 역사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드리아누스, 코모두스 등의 여러 황제들은 실제 검투에 직접 참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좌우지간 그 당시에 해군을 동원해 콜로세움 맨 위층에는 '베라리움'이라는 천막 지붕을 펼쳐 관객들을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보호하는 시설까지 갖추었었다고 하니 로마의 영화에 대해 가히 짐작해보고도 남는다.
콜로세움을 돌아보고 개선문, 포로로마노를 거쳐 팔라티노 언덕에 올랐다. 팔라티노 언덕에 오르면 로마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관망해볼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은 전설상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설한 곳이며, 기원전 2세기 경부터 당대의 부유한 유명인사들이 앞다투어 저택을 지었던 고급 주택가였다. 이 고급주택가는 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로마에서 가장 이상적인 주거지로 손꼽혔다. 로마시대의 강남권이라고나 할까? 카툴루스, 크라수스, 키케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이 팔라티노 언덕에서 살았다. 그들이 걷던 거리를 2007년을 살고 있는 내가 걷고 보고 생각에 잠겨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녁에는 로마 시내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인 Sma 마트에서 조각 피자 10유로치(원하는 만큼 즉석에서 잘라내 무게를 재 가격을 매긴다)와 모듬과일, 콜라, 주스를 사다 호텔방에서 먹었다. 동생이 하루종일 영화 타짜에 등장하는 배역 흉내를 냈다. 김혜수, 조승우, 아귀역 맡았던 신인배우, 유해진까지 두루두루다. 그동안 그 영화를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본 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동생의 연기는
그나저나 난 Sma마트에 갈 때마다 이 분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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