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러의 맛있는 이야기

배낭여행

물빛의 황홀, 베네치아의 기억 - 2007.7.2

  잠자리가 불편했다. 겉보기에는 루체른의 집단수용소 같은 숙소보다 훨씬 좋아보이는데 침대가 영 불편해서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꾸 자다 깨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찌뿌둥한 아침이었다. 간단한 쿠키와 크로아상, 그리고 오렌지주스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이렇게 덤덤하게 써내려가니 내 감정이 제대로 전달이 안된다. 사실은, 아침밥을 매우 중요시하는 나에게(난 항상 아침은 한정식으로 든든하게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이런 간식거리로 아침을 보내라는 거냐! 하면서 속으로 외치며 쿠키에 잼을 발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아침을 크로와상 하나와 카푸치노 한 잔으로 때운다. 그동안 들른 지역보다도 아침이 더 부실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던데 바로 여기가 로마를 수도로 삼고 있는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인들 따라 이탈리안 스타일로 아침식사를 했다. 이건.. 간식이야ㅜㅜ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숙소가 메스뜨레 역에 있어 열차를 타고 산타루치아 역으로 이동했다. 바포레또 1일 이용권을 구입했다. 2007년 5월에 발간된 가이드북에 명시된 가격보다 1유로가 더 올랐다. 베네치아에는 자동차가 없으며 교통수단은 배다. 바포레또는 수상 버스로 곳곳에 정류장이 있고 노선도도 있다. 우리는 하루종일 이용할 수 있는 일일권을 샀는데, 하루종일 배를 타면서 아무도 표 검사를 하지 않아 보조 가방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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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포레또 1일 이용권, 그런데 아무도 표 확인을 하지 않았다 -_- 솔직히 그냥 타도 될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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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포레또 정류장. 배를 옆에 가져다 붙이면 사람들이 올라타고 내린다>

  리알토 다리와 싼 마르코 성당에 갔다. 이 성당은 9세기 이집트에서 가져온 마가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11세기 초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이집트에 묻힌 사체를 돼지 몸통에 숨겨 베네치아로 가져왔다고 하며, 제단 아래 안치되어 있다. 바글바글한 인파로 베네치아의 여행 인구를 체감할 수 있었다. 명암이 어우러진 조화와 대리석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반사광. 원주로 둘러쳐진 입구와 성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경탄. 비잔틴 예술의 진수라 할 수 있다. 단 하나, 빈 틈 없이 북적이는 관광객들만 제외하면.

  어제 먹었던 피자집에서 마르게리따 패밀리사이즈 피자와 캔 소다 두 개를 사서 먹었다. 정말 행복했다. 이제 영국과 스위스에서 먹었던 맛없는 음식과는 안녕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훨씬 맛있는 음식. 식욕을 절로 돋구는 음식들과 음식 냄새에 절로 행복한 웃음이 만연해진다. 먹을 거 하나에 이렇게 표정이 산다. 어쩌면 나란 사람은 정말 단순한 사람일지도.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인다는 음식점은 한국에도 많고, 유럽 어느 나라에도 있지만, 현지에서 맛보는 맛은 분명 뭔가 다른 무언가가 있다.

  피자를 먹을 때 자꾸만 새들이 접근해 와서 성가셨다. 큰 빵덩이 하나를(엄지손가락 크기) 던져줬더니 조그마한 참새 한 마리가 통째로 물고 날아가버려 황당했다. 저 큰 걸 제 혼자 독점하겠다는 건가. -_- 더 놀라운 건 어떻게 그 조그만 새가 제 머리 두 배는 됨 직한 빵 덩이를 물고 휭- 날아가버릴 수 있는건지. 호기심에 피자 뒷부분에 있는 맛없는 빵덩이를 자꾸 던져줬는데 여기 참새들의 특징은 이렇다. 누구든 일단 먼저 빵덩이를 부리로 물고 →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 그리고 덩치가 커다란 비둘기는 거의 빵을 차지하지 못한다. 일부러 비둘기 앞에 빵덩이를 던져 주면 비둘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쳐다보고 있는다. 그러면 어디선가 참새가 나타나 빵 덩이를 물고 날아가 버린다. 조금 더 빠른 비둘기는 몇 번 쪼아먹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나타난 참새가 빵 덩이를 통째로 물고 날아가버린다. -_-;

  싼 마르코 광장에서 사람에 치이듯 여기저기 걸어다니면서 본 두깔레 궁전은 그것을 소재로 한 그림을 한국의 루브르 전에서 봤었는데 제목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다. 두깔레 궁전을 처음 봤을 때 내지른 소리. "어~ 나 이걸 그린 그림을 분명히 봤었는데..." 싼 조르지오 마죠레, 산타 마리아 살루떼 성당을 지나 탄식의 다리를 봤다. 베네치아는 멋진 곳이다, 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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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깔레 궁전.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의 관저. 날개달린 사자상은 마가
                        복음서 저자 성 마르꼬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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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싼 마르코 광장 종루. 원래 적의 침입 감시를 위해 세운 것으로 지금
                        은 전망대로 그 특수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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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식의 다리. 사형수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이 다리를 건너가
                        다가 대리석 창을 통해 생아 마지막으로 베네치아와 바다를 보며 탄식
                        을 했다고 한다. 이 다리를 건너간 사람 중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사람
                        이 바로 '카사노바'>

  리도섬에 갔을 때 동생이 가이드북에 있는 '우리말' 독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빌라(대형 슈퍼마켓)에 들르지 못한 채 버스를 타고 해변으로 이동했다. 카메라는 가방에 집어넣고(시커멓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 반나체, 혹은 나체로 누워있는 해변을 걸어다니면 오해를 사지 않을까 하는 나의 배려?소심함?) 쪼리를 손에 들고 바닷가를 거닐었다.

  무라노섬은 유리공예로 유명하다. 단편작가 가브리엘리 단눈치오는 그의 소설에서 유리세공업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13세기부터 고급 유리제품으로 명성을 얻은 베네치아는 화재를 방지하고, 제조과정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유리공장들을 무라노섬에 집결시켰다. 유리세공은 화덕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단눈치오의 소설 제목도 <불>이다. 불에 녹은 유리가 부풀어오르기도 하고, 구부러지기도 하면서 반짝이기도 하고, 파열되기도 한다. 유리세공인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유리를 빚기 시작한다. 세공인들의 손놀림에 따라 유리덩어리들은 배가 되기도 하고, 식물, 새, 그릇으로 변화한다. 세공된 용기는 다시 가마방에 넣어 담금질을 통해 아름다운 창조물이 된다. 유약하고 차가운 보석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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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노섬의 유리공예품들>

  우리도 이곳에서 부모님께 선물로 드릴 유리공예품을 샀다. 무겁다. 무라노섬에서 다시 바포레또를 타고 산타 루치아 역으로 가는 길에 동쪽 하늘에 먹구름이 일면서 간간이 번개가 치는 것이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리와는 전연 상관없는 일로 생각해 번개를 사진에 담을 궁리만 했다. 번개를 사진에 담는 노하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대로 읽어두지 않고 슥 스크롤을 내렸던 것 같았다.

  "야 어떻게 하면 번개가 카메라에 잡힐까"

  - 그런데 머지 않아 먹구름의 이동속도가 바포레또를 앞질러 비가 몇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우로 바뀌었다. 비는 연신 내리고 창문으로는 바깥을 전혀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뚜렷했던 시야는 가려지고, 바포레또 기장은 계속 여기저기 무전 연락을 하고 나와 동생만 있는 선실에는 모조 명품을 파는 흑인들이 떼지어 들어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고, 여러모로 심란했다. 더욱 심란한 건 원래 오늘은 베네치아의 야경을 보기로 계획했었다는 점이다. 베네치아도 9시 반은 지나야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폭우 속에서는 야경이고 자시고 집에 가서 누워있을 수밖에 없을 듯했다. 내일 모레는 로마로 이동할 계획이라 내일은 야경을 보고 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면 그 다음날 열차 시간에 맞춰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때문에 굳이 오늘 야경을 보고 들어가려 했었는데. 그런데 뭐 어쩔 수 없지, GG치고 숙소로 가자. 그런데 아직 저녁도 못먹었는데 저녁은 어떻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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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까지만 해도 저 먹구름은 딴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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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후 이렇게, 앞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배가 빙빙 돌아 산타 루치아 역에 도착하자 비가 그치고 하나 둘씩 야외 테이블의 바를 닦고 곤돌라를 정비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현지인들의 이런 행동으로 보아 비가 지나간 것 같았다. 우리도 이리저리 다니다가 어느 트라토리아에 들어갔다. 이탈리아의 음식점을 요약해보자면 리스또란테(ristorante)와 뜨라또리아(trattoria)가 있다. 리스토란테는 트라또리아에 비해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가격도 그만큼 높다. 반면 뜨라또리아는 전통적인 대중 음식점으로 보통 가족이 운영하며 가정식 요리를 파는데, 나는 리스또란테보다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요리를 하고, 아들은 서빙을 하는 식의 트라토리아의 따뜻한 분위기에 더 마음이 갔다. 마르게리따 피자와 까르보나라를 시켰다. 주문을 받자 아저씨는 피자 반죽을 시작하고, 아주머니는 까르보나라를 만든다. 서빙을 하는 두 아들이 빵과 과자를 내왔다. 나무 대들보와 부드러운 조명이 마음에 든다. 까르보나라가 별로 느끼하지 않고, 계란 스크램블 맛이 진했다. 달걀소스가 들어있는 진짜 까르보나라.

  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베네치아의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아까 폭우가 쏟아질 때만 해도 오늘은 못볼 줄만 알았던 베네치아의 야경. 두깔레 궁전에 있는 광장까지 바포레또를 타고 이동했다. 개인적인 느낌은 굳이 두깔레 궁전까지 갈 필요 없이 산타 루치아 역 근처를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야경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날 우린 12시가 조금 넘어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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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만큼이나 많은 물로 이루어진 도시 베네치아.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도덕과 타락, 그 밖의 수많은
대립들이 공존하고 세상의 모든 색과 형태들이 모여 있는 곳.
베네치아는 결국 그에게 예술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었다."
- 「신의 바닷가 또는 베니스의 죽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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